고당 조만식의 생애 1 | 하나님과 나라를 사랑한 민족의 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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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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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식 장로는 1882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의 한 시골에서 독자로 출생하였다. 6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여 8년만에 마치고 15살 때부터 포목상을 경영 한동안 술 잘 먹고 돈 잘 쓰는 사업가로도 알려졌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가게를 정리하고 대동강변 배기섬에 피난하였는데 이때 그곳에서 친구를 통해 신학문과 교회에 관하여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 개신교회의 예배를 참관하고 충격을 받은 그는 몇 일 동안을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기로 작정하였다.

1908년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조만식은 동경유학시절 바쁜가운데도 ‘동경한인교회’ 를 창립, 영수로, 기독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 31살에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부임하였다. 부임한지 1년만에 교감이 되었고 다음해 교장이 되었다.

33세의 청년교장은 머리를 깎고 항상 한복을 입고 다녔다. 그는 젊음을 다바쳐 교장, 교사, 사감, 사환의 4역을 감당하면서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가르쳤고 성경과목을 필수로 복음을 전하고 전도하였다.

그는 평양 YMCA의 총무가 되었고 산정현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다. 그는 금주운동과 전도에 힘썼으며 교인들을 중심으로 1922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 조선물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국산품애용을 독려하고 ‘풀뿌리 민족운동’을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간디로 평생 개량한복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국산품만 애용하면서 나라와 국민들을 사랑했을뿐 아니라 갖은 협박에도 일제에 철저하게 불복종하되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일관하여 누구보다도 더 무서웠던 조만식 장로는 무엇보다도 22세에 늦게 깨달은 기독교 복음에 순수하면서도 철저하였다.

오직 민족과 믿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말과 행실이 진실하였던 조만식 장로는 한국이 낳은 훌륭한 지도자였으며, 믿음의 사표였다. ‘신앙을 승화하여 일생을 올곧게 산 민족의 등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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